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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야구영웅이 기억하는 이름 '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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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인비 (124.♡.34.247)
댓글 0건 조회 8,658회 작성일 19-05-19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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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3_113722.jpg쿠바 마탄사스 자택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빅토르 메사 쿠바 대표팀 감독(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빅토르 메사. 

 

만약 당신이 요즘 야구팬이라면 ‘프리미어 12’에 참가하는 쿠바 대표팀 감독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올드 야구팬이라면 1980, 90년대 쿠바야구 전성기를 이끌던 ‘호타준족’의 쿠바야구 스타의 이름이 생각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메사는 쿠바야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고, 지금도 쿠바야구를 대표하는 야구인으로 세계야구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기자는 9월 중순 열흘 가까이 쿠바야구를 현지취재했다. ‘프리미어 12’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세계아마추어 야구계의 전설이며 미 메이저리그의 주요 선수공급원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쿠바야구를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인터넷에 떠도는 남의 기사, 남의 관점을 기자인 내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하는 게 늘 꺼림칙했다.

 

취재를 계획하며 누구보다 만나고 싶었던 이는 다름 아닌 메사였다. 그가 쿠바야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는지 기자는 메사의 마탄사스 자택에서 그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쿠바야구 영웅’으로 불리는 메사는 과거 쿠바야구를 회상하며 지금의 쿠바야구가 가야할 길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우지 못했던 한 한국인 투수를 기억해냈다. 

 

세계야구계에서 ‘붉은 악령’으로 불렸던 쿠바 대표팀과 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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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프로팀 마탄사스 선수단 숙소. 3층짜리 건물에서 선수들은 숙식과 훈련을 병행한다. 구단 버스는 1대. 이들은 원정경기 때 항공편을 이용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버스를 활용한다. 멀면 10시간이 넘는 거릴 버스로 이동하기 일쑤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프리미어 12’ 참가를 앞두고 한국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치르기 위해 11월 2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쿠바 대표팀은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자국 프로리그에서 특출난 활약을 보이는 스타 선수들이 많아선지 쿠바 대표팀은 과거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강력하게 선수들을 리드하는 까닭인지 이번 쿠바 대표팀은 과거의 평과는 정반대였다. 그 한 사람은 바로 메사 쿠바 대표팀 감독이었다.

 

빅토르 메사.

 

1960년 쿠바 산타클라라에서 태어난 메사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쿠바 연감엔 1957년 태생으로 표기, 국제대회 제출용 프로필엔 1960년 기재). 1978-1979시즌 19살의 나이로 우리의 프로리그 격인 ‘쿠반 세리에 나시오날(Cuban National Series)’에 참가한 메사는 그해 도루 20개를 기록하며 기동력 넘치는 플레이를 펼쳤다. 

 

그 뒤로도 그는 계속 빠른 발을 과시하는데, 특히나 과감한 홈스틸에 연달아 성공하며 ‘안타가 필요 없는 득점 기계’로 불렸다. 도루 못지않게 파워 넘치는 타격 역시 메사의 장점이었다. 메사는 어린 나이에도 쿠바 최고의 투수들의 빠른 공에 주눅 드는 법 없이 자기만의 스윙을 계속했고, 덕분에 중요한 순간마다 홈런을 기록하며 쿠바야구계가 꼽는 최고의 ‘호타준족’으로 우뚝 섰다.

 

그가 쿠바 자국리그를 벗어나 국제무대에 얼굴을 드러낸 건 1981년부터였다. 그해 캐나다 에드먼튼에서 열린 대륙간컵대회에서 메사는 폭발력 넘치는 스피드와 파워로 세계야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 ‘에이스’ 최동원은 최우수선수상(MVP)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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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사는 현역 시절 홈스틸의 달인이었다. 국제대회에서도 그의 홈스틸은 자주 나왔다. 사진은 홈스틸을 감행하는 현역 시절 메사(사진=쿠바 마탄사스 구장 박물관)

메사의 전성기는 1982-1983시즌부터 시작했다. 메사는 자국리그에서 여전히 빠른 발과 강력한 파워로 다른 선수들을 압도했고, 국제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83년 대륙간컵대회에서 타율 .476를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데 이어 1984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선 대회 MVP에 올랐다. 당시 동메달을 목에 건 미국 대표팀 외야수는 훗날 메사를 “나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하며, 파워 역시 월등한 타자였다”고 회상하며 “그가 만약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면 리키 헨더슨을 능가하는 최고의 ‘호타준족’이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 평을 한 이는 바로 배리 본즈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타율왕에 오르며 녹슬지 않은 타격을 과시한 메사는 결국 팀을 금메달로 이끌었고, 1995년을 끝으로 쿠바 대표팀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쿠바야구의 영혼’으로 불렸다. 

 

그가 국제대회에서 이룬 성적은 지금도 세계야구계에선 누구도 넘기 어려운 기록으로 추앙받고 있다.

 

메사 통산 국제대회 성적

세계야구선수권대회(5회 출전) : 타율 .381/출루율 .410/장타율 .610/도루 40개 

대륙간컵대회(1회 출전) : 타율 .366/출루율 .385/장타율 .792

올림픽(1회 출전) : 타율 .561/출루율 .571/장타율 .903/홈런 3개

팬아메리칸게임(4회 출전) : 타율 .3561/출루율 .444/장타율 .614/홈런 15개, 도루 35개

 

메사의 대활약은 국제대회뿐만 아니라 자국리그에서도 인상적이었다. 1996년 은퇴할 때까지 메사는 자국리그에서 무려 19시즌을 뛰었다. 변변한 재활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고, 박봉에 시달리는 쿠바야구선수들의 현역생활 기간이 1990년대까지 평균 7, 8년 남짓이었음을 고려하면 메사는 장수를 넘어 천수를 누린 야구인이나 다름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현역 선수로 뛰면서도 늘 꾸준한 성적을 냈다는 데 있었다. 

 

메사는 통산 1천752경기에 출전해 타율 .318/출루율 .383/장타율 .885, 2천171안타(2루타 351, 3루타 46), 273홈런, 1천174타점, 588도루를 기록했는데 이는 ‘쿠반 세리에 나시오날’리그 타격 전 부문 상위권을 점하는 성적이었다.

 

2013-2014시즌 기준 메사 통산 성적 순위

통산 도루 2위(도루왕 14회)/안타 7위/타점 공동 7위/2루타 8위/홈런 14위
 

‘쿠바야구 영광의 시절’을 대변하는 아이콘에서 ‘쿠바야구 중흥의 기수’가 된 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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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현역 생활을 정리한 메사가 라티노아메리카구장에서 열린 성대한 은퇴식에서 기념 액자를 받는 장면(사진=라티노아메리카구장)

1996년 성대한 은퇴식을 치르고 쿠바리그를 떠난 메사는 그해 무대를 쿠바에서 일본으로 옮겼다. 그렇다고 그가 진출한 무대가 프로야구였느냐? 그건 아니었다. 그는 NPB(일본야구기구) 팀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일본 사회인야구계로 진출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숱한 유혹에 시달린 야구인이었다. 현역 시절엔 끊임없이 메이저리그 팀들의 구애를 받았다. 몇몇 팀에선 “우리가 망명을 주선해줄 테니 비밀리에 대표팀에서 이탈하라”는 요구까지 했다. 하지만, 메사는 그때마다 유혹을 거절했다. 이유는 하나. 조국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때나 지금이나 쿠바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뛰려면 망명밖엔 답이 없다. 1961년 쿠바혁명 이후 2014년까지 쿠바는 미국과 단교상태였던 데다 쿠바는 미국 정부가 꼽는 대표적 적대국이었다. 메사가 미국 대신 일본을, 그것도 사회인야구팀에 입단한 건 쿠바국적을 유지하면서도 해외야구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가 일본 사회인야구팀에 입단할 때도 그의 신분은 쿠바 정부가 해외에 파견한 국가공무원이었다. 신분이 국가공무원이었던 까닭에 그는 프로팀에 취업할 수 없었다.

 

일본 사회인야구팀에서 그는 아시아야구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1999년 닥스팀에서 뛸 땐 그해 열린 일본사회인야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메사의 일본생활은 2004년 끝났지만,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가 보여줬던 폭발력 넘치는 스윙은 아직도 일본야구계에 생생히 각인돼 있다. 

 

현역생활을 모두 정리한 메사는 그 후 지도자로 활약했다.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야구계의 속설을 깨고 2011년부터 마탄사스 감독을 맡은 메사는 만년 하위권을 맴돌던 소속팀을 2012-2013, 2013-2014시즌 2시즌 연속 리그 2위로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했다.

 

지도력을 인정받은 메사는 201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쿠바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네덜란드에 연거푸 발목이 잡히며 2라운드를 끝으로 탈락했지만, 그는 쿠바 특유의 선굵은 야구와 동시에 아시아야구의 세밀함을 접목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메사 역시 “일본야구를 경험하며 번트와 팀 플레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밝혔는데 실제 메사가 쿠바 대표팀을 맡은 이후 팀 분위기는 이전 대표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지해졌고, 세밀한 플레이에도 정성을 다하는 야구 스타일로 바뀌었다.

 

‘2015 프리미어 12’ 쿠바 대표팀 사령탑으로 메사가 선임된 것도 그의 이러한 지도성향이 긍정적으로 평가됐다는 분석이다. 쿠바 현지에서 만난 쿠바야구 관계자는 “대표팀 주축 선수들이 미국 망명과 일본 프로팀 진출로 대거 공석이 생기면서 쿠바야구는 예전보다 훨씬 약해졌다”고 솔직히 인정한 뒤 “이러한 팀 사정을 고려했을 때 과거 쿠바야구 스타일이 더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빅볼과 스몰볼을 겸비한 메사야말로 대표팀 감독으로선 최적의 인물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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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야구 대표팀은 '세계 최강'이란 꼬리표를 수십년째 달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 쿠바야구를 '세계 최강'이라 부르는 이는 드물다. 쿠바야구는 현재 위기와 맞서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현재 쿠바야구는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쿠바인들의 절대적 사랑과 지지를 받았던 쿠바야구는 과거 올림픽 3회 우승에서 보듯 세계 아마추어야구계의 최강자였다. 메이저리그 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에 덜미를 잡힌 뒤 조금씩 추락하기 시작해 1, 2회 WBC에서 우승을 일본에 뺏기며 체면을 구겼다. 여기다 3회 WBC에선 2라운드에서 탈락하며 세계야구계로부터 “예전의 쿠바야구가 아니다” “세계야구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는 혹평을 들었다. 이는 쿠바 야구팬들의 자국야구 관심이 갈수록 떨어지는 주요 배경이 됐다는 분석이다.

 

한술 더 떠 쿠바 자국리그는 리그를 주도했던 주요 선수들이 잇따라 미국으로 망명하며 ‘스타 기근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들이 ‘보고 자랄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다 유럽축구가 연일 방송을 타면서 아이들과 젊은 층에선 야구가 어느덧 ‘올드한 스포츠’가 돼가고 있다. 쿠바 대표팀이 ‘프리미어 12’ 우승에 목숨을 걸듯 달려드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과연 메사는 ‘추락하는 쿠바야구’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메사는 “프리미어 12에서 가장 강력한 우리의 라이벌은 한국과 일본”이라며 “11월 4, 5일 한국에서 열리는 친선경기뿐만 아니라 프리미어 12에서 치르게 될 한국전에서도 최선을 다해 쿠바야구 인기를 원위치로 되돌려놓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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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시절부터 메사 감독은 희로애락을 극명하게 표출하는 이였다. 감독이 됐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원체 성격이 불같아 경기 중 작전 지시를 사인이 아닌 입으로 하기도 한다는 것. 3회 WBC에서 네덜란드에 쿠바가 연거푸 패한 것도 메사 감독의 '입으로 하는 사인'을 네덜란드 선수들이 간파하고, 이를 역이용했기 때문이란 '설'도 있었다. 참고로 네덜란드 대표팀 선수 가운덴 네덜란드령 앤틀리스제도 출신 선수가 꽤 있었다. 이들은 스페인어에 매우 능통했다고.(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안녕하세요. 메사 씨. 언제 한번 꼭 당신을 뵙고 싶었습니다.

 

우리 집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저를 보고 싶어하셨는지 궁금하군요(웃음).

 

1980, 90년대 국제대회에 출전했던 한국 대표팀 출신 야구인들로부터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공격이면 공격, 수비면 수비. 못하는 게 없던 쿠바 야구선수로 당신을 기억하는 한국야구인이 상당히 많습니다.

 

과찬이에요. 전 다른 쿠바선수들처럼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한국 선수 중에서도 무척 좋은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많았어요. 저도 그들이 그립습니다(웃음).

 

“꿈은 버려도 조국은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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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마탄서스에 있는 메사 감독의 집. 정면에 보이는 악어그림(마탄사스 팀의 마스코트)이 그려져 있는 집이 메사 감독의 집이다. 그는 집 곳곳에 쿠바 국기와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사진을 걸어놨는데 집권층 인사들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담벼락에 그려진 '체 게바라'의 그림이 인상적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메사 씨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던 1980, 90년대 쿠바 대표팀은 정말 세계 최강이란 수식어가 낯간지럽지 않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때 쿠바 야구는 정말 강했어요. 특히나 1990년대엔 세계 어느 팀도 우릴 꺾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쿠바야구가 세계야구에 끼친 영향이 꽤 컸다고 자부해요. 덕분에 세계 야구팬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이지 그땐 메이저리그 올스타팀과 만나도 팽팽한 승부를 펼칠 만큼 강력한 팀이었어요.

 

그런 강팀을 이끈 주인공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메사 씨였는데요. 여기 쿠바에선 당신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면 배리 본즈나 알렉스 로드리게스처럼 ‘호타준족’의 대명사가 됐을 것이란 평이 많더군요.

 

역시 과찬입니다. 배리 본즈와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정말 위대한 선수들입니다. 제가 많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수들이에요. 제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대도 그 선수들보단 잘하지 못했을 거예요. 


너무 겸손하신데요.

 

물론 자신감은 있었을 겁니다. 제가 쿠바 대표팀 멤버였을 때 메이저리그 팀들과 친선경기를 펼친 적이 있어요. 훗날 유명한 메이저리거가 될 미국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가한 국제대회에서도 미국 대표팀을 자주 상대했죠. 거기다 운이 좋아 빅리그 선수들과 함께 운동한 경험도 있어요. 제가 한창 전성기 때 프랑크 토마스(전 시카고 화이트삭스 강타자)와 훈련을 같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네, 제 나름대로 아주 유명한 메이저리거들을 꽤 알고, 미국야구도 잘 안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저도 한때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꿈이요?

 

모든 야구선수가 꿈꾸는 무대. 네, 저도 젊었을 땐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보는 게 꿈이었어요.

 

감독님 실력이었다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성공했을 듯한데요. 한번 도전해보지 그러셨습니까.

 

(짧게 한숨을 토해낸 뒤) 저도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제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밖엔 없었어요. 전 제 조국을 버리면서까지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고 싶진 않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쿠바 출신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는데요. 이 선수들은 메사 씨와는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꿈을 이룬 이들입니다. 이 선수들을 바라보는 메사 씨의 관점이 궁금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에요. 전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우리 쿠바 출신 선수들을 절대 미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난 조국을 배신하기 싫어 꿈을 버렸는데 너희는 나처럼 하지 않은 거야’하는 이야기도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제 솔직한 마음을 말씀드린다면.

 

네.

 

전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우리 쿠바 선수들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길을, 그들이 결정한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에요. 전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내 조국에 살면서 야구를 계속했고, 일본야구까지 경험했어요. 현역 은퇴 후엔 프로팀 감독을 맡고, 대표팀 사령탑까지 올랐습니다. 덕분에 11월이 되면 쿠바 대표팀 감독 자격으로 한국 야구팬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게 뭘 뜻하겠습니까. 전 제게 주어진 길을, 제가 선택한 길을 살아온 거예요. 우린 지금 각자의 결정을 비난하기보다 존중해줘도 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 쿠바인 메이저리거들이 더 성공해서 선수 자신과 그 선수들을 키워준 고국의 야구팬들 모두가 행복했으면 합니다(웃음).

 

“신체적, 기술적으로 여전히 쿠바야구는 세계 최강. 문제는 부족한 정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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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탄사스 팀의 홈구장(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메사 씨가 현역으로 뛰었던 시대만 해도 쿠바야구는 세계 아마야구의 절대 강자였습니다. 그러나 2008년부터 그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WBC를 취재하면서 느낀 건 쿠바야구가 ‘세계야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쿠바야구팬들도 쿠바 대표팀의 부진을 두고 실망이 큰 듯한데요.

 

지금 우리 선수들도 과거 제가 현역으로 뛸 때처럼 육체적, 기술적으론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자신들이 노력하는 것만치 실력이 따라오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더 강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정신력이라.

 

제가 우리 선수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꿈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 속에 담긴 구체적 의미가 궁금한데요.

 

대표팀 선수라면 늘 승리를 꿈꿀 겁니다. 중요한 건 승리하기 위한 마음가짐에요. 제가 대표팀 선수로 뛰었을 때 우리 선수들은 이기겠다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지겠다.’ ‘질 수 있겠다’하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예외 없이 거의 모든 선수가 그런 강인한 정신력이 부족한 느낌이에요. 강인한 정신력은 ‘이기자’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질 수 없다’는 확실한 각오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봅니다. 물론 우리 쿠바 선수들은 여전히 강하고, 야구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야 하는지도 잘 알죠. 전 그 점에선 늘 우리 선수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쿠바 현지 취재를 하면서 ‘쿠바야구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공터나 운동장에서 야구하는 아이들보단 축구하는 아이들이 더 눈에 띄더군요. 방송만 봐도 해외축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야구보다 많은 듯 보였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나 본 쿠바야구인들과 야구팬들은 하나같이 ‘야구의 위기’를 걱정하더군요.

 

우리는 다시 야구가 쿠바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인기 있는 스포츠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요즘 쿠바 사람들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 더 높습니다. 특히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축구를 매우 좋아합니다. 야구가 다시 쿠바인들에게 사랑받으려면 쿠바 야구인들이 똘똘 뭉쳐 다시 한 번 과거 같은 ‘강한 야구’를 보여주는 길밖엔 없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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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팀 마탄사스를 응원하는 쿠바 야구팬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리미어 12’는 쿠바 입장에선 꽤 중요한 대회일 듯싶은데요. 준비는 많이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걱정이에요. 한국으로 넘어갈 때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단체훈련 기간이 좀 짧지 않을까 싶어요. 과거에도 훈련을 많이 못 해서 낭패를 본 적이 있는데…. 선수들이 잘 해내리라 믿고 있습니다. 한국 대표팀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노코멘트하겠습니다(웃음). 작전상 비밀이에요(웃음). 다만, 한국야구는 매우 우수하고, 우리에겐 좋은 라이벌이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메사 씨 개인적으론 ‘프리미어 12’가 2013년 3회 WBC에서의 부진을 설욕할 수 있는 ‘리벤지 무대’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프리미어 12’ 쿠바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 기분이 어떠했을지 궁금하군요.

 

‘프리미어 12’ 쿠바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 놀라지 않았어요. 2013년에 열렸던 3회 WBC에서도 쿠바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니까요. 만약 제가 ‘프리미어 12’ 쿠바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지 않았다면 전 지금쯤 콜롬비아로 떠났을 겁니다.

 

콜롬비아는 어째서?

 

콜롬비아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와달라는 청이 있었거든요. ‘프리미어 12’가 끝나면 내년에라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일전엔 도미니카에 갈 뻔도 했어요. 전 세계 어딜 가든 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야구는 하나니까요(웃음).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겠습니다. 쿠바인들에게 야구는 ‘인생이자 생활 그 자체’이던데요. 메사 씨에게 야구는 어떤 의미입니까.

 

저도 마찬가지예요. 야구는 제 인생 그 자체에요. 야구와 인생을 분리해 생각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 선수 가운데 생각나는 이는 단 한 명. 그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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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사진=롯데)

메사 씨 가족은 야구가족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큰아들이 메사 씨 소속팀은 마탄사스에서 선수로 뛰는 것으로 아는데요.

 

맞아요. 저와 함께 뛰고 있죠. 큰아들은 6살이 되자 야구를 하고 싶어 했어요. 작은아들은 5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죠. 저는 절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의사이신 것으로 아는데요. 부인은 아들들이 야구선수보단 의사의 길을 걸었으면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빙그레 웃는 메사 대신 그의 부인이 대답) 우리 아이들은 의학을 증오해요(웃음). 당연히 의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농담입니다. 아이들은 아빠를 닮아선지 야구를 더 좋아했어요. 애 아빠는 그것 때문에 무척 행복해했고요(웃음). 

 

(메사가 말을 이어받으며) 작은 녀석은 잘 치기 합니다만, 별로 빠르지 않아요. 반면 큰 아이는 잘 치고, 잘 달려요(웃음). 지금도 꾸준히 잘 성장하고 있죠. 작은 아이도 형 나이가 되면 지금의 형처럼 좋은 선수로 성장하리라 기대하고 있어요. 

 

과거 쿠바 대표팀 멤버로 뛰실 때 한국 대표팀과 많은 경기를 치르신 것으로 압니다. 혹여 생각나는 선수가 있으신지요?

 

아시아 투수 중엔 정말 좋은 투수가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니까요.

 

(뭔가 생각난 듯) 음, 기억이 희미하긴 한데요. 아마 한국 투수 중에 초이(Choi)였나…네,   ‘초이’란 투수가 있었을 거예요. 그 친구는 정말 훌륭한 투수였어요. 한국 투수 가운데 제일 좋았던 거로 기억합니다.


‘초이’라면 혹시 ‘동원 초이(최)’ 아니었나요? 금테 안경을 끼었던…?

 

맞아요. 안경을 끼었던 선수. 그 친구 공이 참 빨랐던 것으로 기억해요. 변화구도 (오른손을 들었다가 빠르게 떨어트리며) 이렇게 ‘뚝’ 떨어졌죠. 특히나 제가 왜 초이를 기억하느냐 하면.


네.

 

한국 대표팀이 우리 쿠바 대표팀과 붙을 때면 항상 초이가 등판했어요(웃음).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였죠. 그 친구는 요즘 뭐하고 있습니까. 잘 지내고 있나요?(웃음).

 

2011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깜짝 놀라며) 아, 그래요. 음, 원래 별은 밝은 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 빛나게 마련입니다. 그는 화려했던 현역시절보다 더 화려하게 빛날 거예요. 꽤 마음이 아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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